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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 여사’ 퐁파두르 후작부인 풍자시 일방 철거…누구 뜻?

SUNDISK 2023. 4. 19. 08:19

 

 

‘김건희 여사’ 후작부인 풍자시 일방 철거…누구 뜻?

한겨레    박수혁  기자    /    등록 2023-04-18 12:00수정 2023-04-19 02:31

 

 

춘천시, 효자동 주민자치회 추진 전시에 예산지원
춘천민예총 제공 30점 중 문제의 시 일방적 철거

 

 

춘천시가 철거한 정지민 시인의 <후작부인> 작품. 정지민 시인 제공

 

강원도 춘천시가 윤석열 대통령 부인인 김건희 여사를 풍자했다는 이유로 지역 문학단체와 주민자치회가 거리에 게시한 시 1편을 철거해 논란이 일고 있다.

 

18일 춘천시의 말을 종합하면, 춘천민예총 문학협회는 지난달 4일부터 오는 30일까지 ‘시가 흐르는 효자동 약사천에서 힐링하세요’란 주제로 시화전을 열고 지역에서 활동 중인 시인 30명의 시를 게시했다. 이 사업은 효자1동 주민자치회와 춘천민예총이 계약을 맺고 추진한 것으로 춘천시가 예산 150만원을 지원했다.

 

하지만 게시된 작품 가운데 1편이 지난달 중순 갑자기 사라졌다. 사라진 시는 정지민 시인이 쓴 <후작부인>으로 ‘좌파도 우파도 아닌/퐁파드르 후작부인은 베겟머리파였네/폭탄주에 취한 귀족들만 몰랐던 거지/용산의 베겟머리파 그녀/우아한 흰색 원피스 입고/오늘도 뉴스에 나오시네/루이15세는 그녀의 말만 듣지/*20년간은 처녀로/15년은 창부로/7년간은 뚜쟁이로 보낸 여인(*마담 퐁파드르의 묘비문)”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후작부인은 프랑스 국왕인 루이15세의 애첩으로 프랑스 정치에서 숨은 실력자로 통했다.

 

해당 작품이 정치색이 있다는 민원이 제기되자 춘천시가 춘천민예총 쪽과 사전 협의 없이 자체적으로 철거한 것이다. 작품이 철거된 사실도 해당 작품을 쓴 시인이 지인의 제보를 받고 지난 15일 현장을 방문한 뒤에야 확인할 수 있었다.

 

춘천민예총 문학협회는 시를 게재한 문학단체나 시인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무단으로 시를 철거했다는 이유로 반발하고 있다. 협회는 춘천시에 공문을 보내 ‘작가 의견과 상관없이 전시작품을 무단 철거하는 행위는 예술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행위”라며 철거 작품 원상 복구와 사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권택삼 춘천민예총 문학협회장은 “민예총은 춘천시가 아니라 주민자치회랑 계약했다. 주민자치회라는 말 그대로 주민 스스로 자체적인 사업을 하도록 독려하고 장려해야 하는데, 예산을 지원했다고 춘천시가 위에서 통제하는 식으로 작품을 철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런 천박한 인식은 예술가들을 정신적으로 탄압하고,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작품을 쓴 정지민 시인도 “한 개인이 아니라 문학과 시 등 예술에 대한 모욕이다. 이 작품은 김건희 여사를 후작부인에 빗대 풍자한 것이 맞다. 예술은 서정적일 때도 있지만 현실에 맞서 글로써 저항하거나 싸울 수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철한 춘천시 효자1동장은 “작품에 정치색이 있다는 민원이 제기돼 철거했다. 민예총은 작품 30점을 제공했고, 작품 1점당 5만원을 지불하는 식으로 사용 승인을 얻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원상 복구는 하지 않을 계획이고, 시청 변호사 자문을 얻어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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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퐁파두르 (Marquise de Pompadour)

 

 

 

기대앉은 여인의 의상이 마치 요즘 사극에서 나오는 여인의 그것처럼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하다.

책을 읽다 어딘가 바라보고 있는 이 여인은 프랑스 루이 15세의 애첩이자,

궁중의 로코코 문화의 중심적인 여인인, 퐁파두르 후작부인이다.

 

악보를 읽다가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우윳빛 피부와 단정한 이목구비, 그윽한 눈길,

지적인 인상이 그녀의 고귀한 신분과 교양미를 대변하는 듯하다. 

 

Francois Boucher,

 

1756, Oil on canvas, 201 x 157 cm,

Alte Pinakothek, Munich

 

 

마담 퐁파두르는 로코코 시대를 대표하는,

클레오파트라를 능가하는 미인으로 파리의 금융업자의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잔 푸아송 Jeanne-Antoinette Poisson '이었으며 평민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음악, 문학 등을 개인 교습 받아

상당한 지식과 교양을 겸비하였다.

 

 

1741년에 그녀는 아버지의 조카, 즉 자신의 사촌인 샤를 기욤 르 노르망 데티올과 결혼하여 잔느 앙트와네트 데티올로 이름을 바꾸고 딸 알렉상드린을 낳았다.

1744년에는 가끔 수렵을 하러오던 루이 15세에게

우연히 그 미모가 눈에 띄어 내연 관계를 맺게 되었다.

 

루이 15세의 젊은 정부인 샤토루 공작부인이 갑자기 죽자

그녀는 곧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그녀는 남편과 법적인 이혼절차를 밟은 뒤

그녀에게는 곧 후작 부인의 칭호가 주어져 귀족으로 신분이 격상되었으며,

남편과 이혼하여

1745년 9월 14일, 그녀의 나이 24세때  정식으로 왕의 정부(情婦)로서 인정되어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부끄럼 많고 내성적인 루이 15세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퐁파두르는 그의 개인 비서 역할을 하면서 명령을 내리기도 했으나 결정은 국왕이 했다. 그녀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조심스럽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왕비인 마리 레슈친스카 (Marie Leszczynska, 1703~1768) 는

멋있고 예술적이며 세련되고 쾌락을 추구하는 국왕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아내였다.

그녀는 국왕보다 8살 연상으로 아버지(폴란드의 망명국왕)의

안녕과 자식양육, 신앙에만 몰두했다.

왕세자를 비롯한 8~9명의 자녀를 낳은 뒤

국왕에게 성적인 접촉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부인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왕비의 측근조차

“퐁파두르 부인은 내가 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하나”

라고 토로할 만큼 외모가 뛰어났지만,

그러한 그녀의 외모보다 그녀의 사려 깊은 마음씨와 교양,

사고의 깊이가  왕의 총애를 받는 요인이었다. 

 

프랑스 국왕의 공식 애첩이 된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루이 15세를 매혹시키고 그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돈을 물 쓰듯이 사용하고,

여기저기에 저택과 성곽 등을 건설하였으며

(프랑스 대통령의 관저인 엘리제 궁전은 그녀의 저택 중의 하나다),

이윽고 정치에도 참견하게 되어 약 15년간 권세를 누리게 된다.

 

한마디로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침대에서 프랑스의 정치를 좌지우지한

그림자의 실력자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나의 시대가 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아한 부인은 당대의 모든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고 묘사한

당시 기록에서 엿볼 수 있듯이,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매우 지성적이었고, 예술 전반에 걸쳐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학예 보호에 힘쓴 그녀의 샬롱에는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등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녀의 다양한 예술적 취미는 프랑스의 문예를 진흥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으니,

극장이나 소극장의 건립은 물론 당대의 예술가들도

모두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후원을 받았다.

그녀는 가구나 도자기, 그릇, 의상, 보석, 그림, 책 등 많은 수집품을 모았는데,

그녀가 갑작스레 죽은 뒤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는 데에만 1년이나 걸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시대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우아한 로코코 양식이 발달했던 시대가 되었다.

볼테르는 퐁파두르 부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추모했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추모한다……

천성이 진실한 그녀는 국왕을 사랑했다.

그녀는 올바른 영혼과 정의로운 가슴의 소유자였다.

이 모든 것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셰의 초상화에서 보듯이 우아한 모습의 풍파두르 부인은

상당한 미인임이 틀림없으며

고고한 품격과 교양미가 넘치는 점으로 보아

유럽에서 가장 귀부인다운 귀부인으로 손꼽혔을 만하다.

 

또한 그녀 옆에 있는 많은 책과 손에 들린 악보가

그녀의 지성과 예술성을 짐작하게 한다.

당시는 보수적인 정치가나 신학자들에 의해 백과사전의 판매가 금지되었는데,

진보적인 문학가나 사상가들은 이를 판매하여야 한다고 격론을 벌이던 때였다.

퐁파두르 부인의 기지로 마침내 프랑스에서

백과사전의 판매가 허용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Francois Boucher,

Madame de Pompadour

1758, Oil on canvas, 72,5 x 57 cm,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그림에서 보이는 그녀의 헤어스타일은 여자들이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인데

18세기 초까지는 바로크 시대에 유행했던 퐁타주형,

즉 머리를 틀어 마치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으로 높이 올리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후기에는 머리카락을 부풀리지 않고

뒤로 빗어 넘겨 우아하고 깔끔한 퐁파두르형이 유행하였다.

바로 풍파두르 부인이 유행시킨 것이다.

 

부셰는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는데

그중 1758년에 그린 그림 속 그녀는  매력적이고 강한 개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정부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퐁파두르 부인은 죽는 날까지

왕의 뜨거운 총애를 받았다.

여러 연극의 대본을 다 암송했고 악기 클라비코드를 수준급으로 연주했으며

아마추어로서는 뛰어난 그림 실력에

보석을 디자인할 줄 아는 능력도 갖췄고

원예에도 조예가 깊었다니

그녀는 참으로 다재다능한 여성이었던 것 같다.

유머도 풍부해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능력 또한 뛰어났다.

 

화가는 그녀의 그 모든 장점을 다양한 지적,

예술적 소품들로 풍성하면서도 짜임새 있게 표현했다.

그래서 왕의 비서실장처럼 일을 도맡아 했는데,

그런 퐁파두르 부인에게 왕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더욱 의지하였다.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퐁파두르 부인> 1755, 종이에 파스텔,

178x131cm , 파리, 루브르 박물관

 

 

그녀는 베르사이유 궁에 들어와 라이벌 격인 왕비 '마리아'를 정성껏 모시고

비위를 맞추어 왕비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루이 15세는 국정마저도 그녀에게 맡기고  주색으로 세월을 보냈다.

 

방탕한 왕과 함께한 여인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사생아만도 서른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20년 이상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실제로 프랑스를 통치한 것은 퐁파두르 부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에게는 자연스럽게 적이 많이 생겨났다.

그 가운데서도 어느 짓궂은 악평가는

그녀가 죽은 후에 쓸 묘비 문구를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고 한다.

 

20년은 처녀로,

15년은 창녀로,

7년간은 '뚜쟁이' 였던 여인.

여기에 잠들다.

 

 

Francois Boucher,

Marquise de Pompadour at the Toilet-Table

1758, Oil on canvas, 81 x 63 cm,

 Fogg Art Museum, Cambridge

 

 

 

퐁파두르 부인은 마흔셋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녀는 정적들과의 암투, 매일 밤 계속되는 연회로 지친 몸에

국정과 왕으로부터 매일 밤 시달리다(?) 보니

고작 서른의 나이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급격이 나빠졌는데

 

거기에서 아마도 왕이 지니고 있던 '비너스의 병' ,

즉 '성병'이 옮겨진 것도 한몫했다고 해석하는 역사 평론가가 많다.

직접적인 사인은 폐렴으로 알려져 있다.

 

Francois Boucher,

Portrait of Marquise de Pompadour

1759, Oil on canvas, 91 x 68 cm,

Wallace Collection, London


 

악평가가 쓴 묘비문의 소위 '뚜쟁이' 시기에 해당되는 때의 그림을 보자.

이제는 손에 책 대신에 부채를 들고 있으며 옷만 화려하지 몸은 지친 듯하다.

실제로 당시 지칠 대로 지친 부인은 궁 안에 녹원을 마련하고는

거기에 각처에서 데려온 미녀들을 모아놓고 왕에게 고르게 하여

매일 밤 젊고 매력적인 미녀를 대령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7년간은 뚜쟁이였다는 악평이 나온 것이다.

 

그녀의 죽음에 왕은 그녀의 곁을 결코 떠나지 않으려 했고,

장례식 때는 정식부인이 아니어서 참석할 수 없자,

외투와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발코니에 서서 계속 찬바람을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가히 한 시대를 그 정점에서 풍미한 여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여인으로 인하여 보르도와인이

프랑스 황실에 공식적인 와인(샤토 라피트 로칠드)으로 선정되었다.

그 전까지는 부르고뉴와인이 황실전용와인이었다.

루이 15세의 애첩으로서 19년간 베르사유궁을 지배했던 마담 드 퐁파두르.

양귀비나 장희빈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삶은

'왕의 여인'이라는 야사의 영역에 머물렀다.

 

그러나 여성이 사회에 진출할 수 없었던 근대 이전,

능력 있는 남성을 유혹하는 일은 여성에게 가장 ‘정치적’인 일이었다. 

미모와 사교술을 동원해 권력자를 장악함으로써

베개 밑에서 세계를 움직인 역사의 숨은 주인공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마담 드 퐁파두르는 역사를 움직인 왕의 정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또 예술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부셰·샤르댕·피갈·볼테르 등의 저명한 작가를 후원해

로코코양식을 창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루이 15세

 

 

 

루이 15세는 철권 정치를 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던 루이 14세의 증손자다.

나이 5세에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올레망 공인 필립이 섭정을 맡았고 그 뒤에도 폴뢰리 추기경이 실권을 쥐고 있어 그는 군왕으로 변변히 구실을 하지 못했다.

성질은 매우 신경질 적이고 나태한 편이어서 정치는 유능한 대신에게 맡기고

 자기는 애첩인 마담 드 퐁파드르와 함께 연회를 열고

풍미가 넘치는 와인을 즐겨 마셨다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계몽시대로 향하던 시대적 배경에서

선왕(루이 14세, 짐이 곧 법이다)의 철권정치에

염증을 일으킨 루이 15세는 나이 다섯 살에 제왕에 올라 일은 소홀히 하고

총명과 재치가 넘치는 드 퐁파두르 마담과 더불어

와인의 향취에 탐닉하면서 명주에 얽힌 숱한 일화를 가꾸어낸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환락과 흥취 속에

 프랑스 대혁명의 폭풍이 배태되고 있었음은 그들 자신도 알지 못했다.

 

 

 

한편 마담 드 퐁파드르는 매우 예지적이고 지혜가 뛰어나

루이 15세에게 여러 가지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진다.

아마도 선왕의 철권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태생적으로 나약한 성품 탓으로

정치의 거센 물결에 뛰어 들기보다는

총명과 재치가 넘치는 마담 드 퐁파드르와 함께

와인잔을 드는 것이 한결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와인에 엮인 군왕 이야기가 나오면

늘 루이 15세가 자리하고 있는 것인 듯하다.

루이 15세가 주최한 축제 만찬에서 샴페인은 왕족으로부터 그 명성을 얻었다.

 

루이 15세는 유별나게 모에 샹통의 샴페인을 즐겨 마신 것으로 유명하다.

고혹적인 황금빛 속에 쉴 새 없이 일고 있는 잔잔한 기포를 보면서

샴페인에 매료 된 루이 15세는 저녁 만찬 때마다

이를 애인 폼파두르와 즐겨 마셨다 한다.

이 만찬에 쓰인 샴페인에는 왕실의 스탬프를 찍었다고 한다.